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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서울화수회 벽산회행사 덕수궁 역사탐방안내 (25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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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덕명
댓글 0건 조회 8회 작성일 25-05-01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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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서울화수회 벽산회행사  덕수궁 역사탐방안내 (25일.일요일)
서울화수회 벽산회 회원님 여러분 잘지내고 계신지요.

5월은 입하가있는 절기로 따뜻함을 지나을 지나 더운 여름날씨로 가고 있습니다
어버이날(8일). 부부의날(21일). 단오(31일)등의 행사가 있는만큼 각가정에 뜻있고 즐겁고 보람된 5월달이 되시기 바랍니다.

5월 벽산회행사는 덕수궁 역사탐방을 하기로 하였으며 아래와 같이 안내하오니. 많이 참여하시어 종인간에 친목을 도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ㅡ 아 래 ㅡ
1. 일시..2025년 5월 25일(일요일).10시30분
2. 모임장소..덕수궁 정문(시청역;1.2호선..1번.2번출구)
   입장료가있으니 신분증지참 요망합니다.

이선동 드림

010-3531-9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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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덕수궁소개

https://royal.khs.go.kr/dsg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대한제국의 황궁이다. 원래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이정(李婷, 1454~1489)의 개인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직후 선조광해군 때 임시 행궁(行宮)으로 쓰였고,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원래의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었는데,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讓位: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 한 뒤,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하였다.

덕수궁이력

월산대군 저택 시기

덕수궁의 자리에는 원래 덕종(德宗)의 큰아들 월산대군 이정의 개인 저택이 있었다. 덕종은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의 큰아들로, 1455년(세조 1)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덕종이 죽은 후, 그의 부인 수빈 한씨(훗날 소혜왕후)는 두 아들과 함께 출궁(出宮)하였는데, 시아버지였던 세조가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한씨 모자가 지낼 저택을 지어주었다. 1469년(성종 1) 한씨의 둘째 아들 잘산군(乽山君)이 제9대 임금인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그의 어머니 한씨도 다시 입궐하였고, 그 결과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있던 저택에는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정릉동 행궁 시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 한양 안에 있던 모든 궁궐과 종묘 등이 소실되었다. 의주로 피난을 떠났었던 선조는 1593년(선조 26)에 한양으로 환도(還都)하였으나, 궁궐이 모두 소실되어 머무를 장소가 없었고, 이에 조선 왕실은 월산대군의 저택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하지만 월산대군 저택만을 행궁으로 삼기에는 공간이 협소하였다. 이에 조선 왕실은 월산대군 저택 주변의 민가를 행궁 권역 안에 포함시켰고, 행궁 안에 있어야 할 관청들도 처음에는 행궁 밖에 두었다가 점차 면적을 넓혀 모두 행궁 안에 들게 하였다. 이중 병조판서를 지냈던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의 저택을 동궁(東宮: 세자가 머무는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영의정을 지냈던 심연원(沈連源)의 저택을 종묘(宗廟)로 삼았다. 

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뒤 1608년 2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정무(政務)를 보았으며, 광해군(光海君)은 정릉동 행궁의 서청(西廳: 오늘날의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경운궁 시기

광해군은 즉위한 뒤에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행궁의 경내로 만들었고, 이와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 등을 차례로 중건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이듬해 정릉동 행궁의 명칭을 '경운궁(慶運宮)'으로 고쳤다. 하지만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약 2개월간 지내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1615년 4월 다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623년 3월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의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내쫓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 훗날 인조)을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卽阼堂)에서 즉위식을 가졌고,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운궁 전각과 대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 뒤로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으로 다시 축소되었다. 1773년(영조 49) 2월 1일 영조는 선조가 의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온지 3주갑(三週甲, 60년이 3번 지남) 되는 해를 기리기 위하여 왕세손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이 다시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896년(고종 33)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이다. 1895년(고종 32)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였고,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1897년(고종 34)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환궁하게 되는데, 원래 머물렀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이 경운궁을 궁궐로 정한 이면에는 정동 일대에 러시아·영국·미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를 요청하기 쉬울 것이라는 고려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운궁을 궁궐로 사용하기 위해 대규모의 공사가 이루어졌고,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되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에서 대한제국을 선포였고, 이로써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 되었다.

1904년(광무 8) 덕수궁 함녕전 온돌에서 발생한 화재가 궁궐 전역으로 퍼지면서, 경운궁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에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안이 제기되었으나,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수옥헌(漱玉軒, 오늘날의 중명전)에서 머무르며 정사를 돌보았다. 화재로 소실된 경운궁의 전각들은 1906년 다시 중건되었으나, 이전에 비해 규모가 축소되었다.  

1905년 수옥헌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고, 그 결과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임을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을 비밀리에 보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헤이그특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서 1907년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었고, 이어 고종의 아들 순종이 돈덕전(惇德殿)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해 11월 13일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덕수궁은 태황제 고종이 거처하는 궁궐이 되었고,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경운궁의 명칭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다.

고종 사망 이후

1919년 고종이 사망한 이후 덕수궁은 본격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1920년 미국공사관 동쪽으로 담장길이 조성되어 덕수궁이 둘로 나뉘어졌고, 덕수궁 권역의 토지가 매각되어 그 자리에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여학교, 구세군 중앙회관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이 헐려 창덕궁 대보단(大報壇) 자리로 옮겨졌다.

1933년에는 덕수궁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대한제국의 정전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석조전(石造殿)은 일본 근대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1938년에는 석조전의 서남쪽에 오늘날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왕가 미술관(신관)을 추가로 건립하였다. 이왕가 미술관을 개관할때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이었던 광명문(光明門)을 중화전의 서남쪽으로 옮겨 흥천사명 동종(興天寺銘 銅鍾)과 자격루(自擊漏) 등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건물로 사용하였다.

해방 이후

해방 이후 1946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개최되었고, 석조전은 UN 한국임시위원회의 사무실과 회의실 등으로 활용되었다. 6.25전쟁 당시 수백 명의 북한군이 덕수궁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덕수궁을 포격하려 하였으나, 당시 미 포병 중위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의 반대로 덕수궁을 포격하지 않았고, 북한군이이 덕수궁을 나와 을지로와 태평로에 도달했을 때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덕수궁이 오늘날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고, 이에 감사하고자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제임스 해밀턴 딜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였다.

1960년대에는 일부 덕수궁의 돌담을 철창으로 교체하였고, 덕수궁 내에 세종대왕 동상 등 새로운 시설물을 설치하였다.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대한문이 도로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고, 1970년에 원래의 자리에서 33m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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